평가와 전망

<차례>

러시아 사회구성체에 대하여

재발간에 붙이는 저자 서문

<평가와 전망>

제1장 러시아 역사발전의 특수성

제2장 도시들과 자본

제3장 1789-1948-1905년의 혁명들

제4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제5장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농민

제6장 프롤레타리아 정권

제7장 사회주의의 제반 선행조건들

제8장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정부와 사회주의

제9장 유럽과 혁명

제10장 권력을 위한 투쟁

 

러시아 사회구성체에 대하여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1931) 제1장 「러시아 발전의 특수성」

러시아 역사의 가장 불변적이며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이 나라의 완만한 발전 속도에 있으며, 따라서 그 결과로서 후진적인 경제, 원시적인 사회 구조, 낮은 문화 수준 등을 들 수 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계 이주민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던, 이 광활하고 거친 평원의 주민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자연적 조건들 자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들과의 싸움은 거의 17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겨울에는 혹한을, 그리고 여름에는 가뭄을 몰고 오는 바람에 대한 싸움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모든 발전의 기반인 농업은 원시적인 조방적(extensive:단위 면적의 땅에서의 생산량이 적은, 거친 경작 형태의 원시적 영농 방식 -역주) 방법을 통해서 발전했다. 즉, 북부 지방에서는 전적으로 산림을 벌채하거나 태우는 방식이었으며, 남부 지방에서는 개간되지 않은 초원들을 마음대로 개척하는 방식이었다. 자연의 정복은 밀도 있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확산적으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구의 야만인들이 로마 문명의 폐허 위에 정착해서는 그토록 많은 고대의 자산들을 자신들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동안, 동구의 슬라브인들은 그들의 삭막한 초원 위에서 어떠한 과거의 문화적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이전에 그 초원에 살고 있던 민족들의 수준은 그들 자신의 수준보다도 훨씬 더 낮았던 것이었다. 곧 자신들의 자연적 경계선에 봉착하게 된 서구의 민족들은 경제적 및 문화적 중심지인 상업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동쪽 평원의 주민들은 협소함을 느낄 때마다 산림을 더욱 깊숙이 뚫고 들어가거나 변방에 위치한 초원 쪽으로 산개해 갔다. 서구에서는 농민들 중 가장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분자들은 수공업자와 상인, 그리고 자치 도시의 시민들이 되었다. 동구에서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자들 중의 일부는 상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대다수는 코자크 기병이나 국경수비대원 흑은 변방의 개척민이 되었다. 사회분화 과정은 서구에서는 가속화되었으나, 동구에서는 지체되었으며 또한 이 같은 영토 팽창 과정을 통해서 희석화되었다. 뽀뜨르 1세(대제)와 동시대인인 비꼬(Vico:18세기 초에 활약한 이태리의 역사가-역주)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의 짜르는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나태한 정신을 지닌 국민을 통치하고 있다. " 러시아인들의 "나태한 정신"은 경제 발전 속도의 정체성, 계급관계의 무정형성, 내부 역사의 빈약함 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 문명들은 충분히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었으며, 또한 저급한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의 수공예품들이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세부까지도 완결된 형태로 사회관계들을 정립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지속성을 지녔었다. 러시아는 비단 지정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낀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서쪽의 유럽과도 차이가 있었으나 또한 동쪽의 아시아와도 달랐다 :러시아는 상이한 시기마다, 상이한 양상으로 둘 중의 어느 한편에 접근하곤 했던 것이다. 아시아로부터 밀려들어온 따따르인(Tatar:러시아에서는 몽고인을 이렇게 부른다-역주)에 의한 오랜 질곡은 러시아의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로 남게 되었다. 서구는 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일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신의 형성 과정에서 동양을 모델로 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서구로부터 가해지는 군사적 및 경제적 압력에 대처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역사가들이 러시아에는 봉건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최근의 연구들은 오히려 봉건 시대가 존재했음을 명확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러시아에서의 봉긴 시대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서구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즉 러시아에서의 봉건 시대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입증하는데 그토록 기나긴 과학적 논쟁들이 필요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러시아의 봉건제는 불완전한 형태였으며, 무정형적이었고 또한 문화적 유산들을 거의 남겨 놓지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후진국은 선진국들이 성취한 물질적 및 이념적 진보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이 선진국들을 노예처럼 졸졸 따라가는 것, 즉 선진국들이 과거에 밟아 온 모든 단계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꼬 및 최근 그의 계승자들의 이론인 역사발전의 순환에 관한 이론은 전자본주의적인 고대 문화들이 보여 주고 있는 반복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경험들에도 기초하고 있다. 항상 새로운 문명 근원지에서 제반 문화적 단계들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은 실제로는 그러한 역사 과정 전체의 지역적 및 시대적 특수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보를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마련해 주었으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실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의 여러 형태들이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이다. 후진국은 비록 선진국들을 따라가도록 끔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선진국들의 과거의 발전과 동일한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상황이 갖는 특권은-그 같은 특권은 존재하게 마련인데 -그 나라의 국민이 어떤 일련의 중간적인 단계들을 건너뛴 채로 선진국들에 의해서 이미 마련된 모든 발전의 성과들을 특정한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수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후진국은 그러한 방식으로 선진국의 발전을 수용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미개인들이 그들의 활을 버리고 총을 잡는다면, 그것은 단숨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활로부터 총으로 발전하기까지 필요했던 모든 과거의 역사들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한 유럽인들은 거기서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독일이나 미국이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질렀다면, 그것은 바로 그 나라들의 자본주의가 뒤늦게 출발한 결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반면, 영국의 석탄 산업의 고질적인 혼돈 상태는-맥도널드(MacDonald:영국 노동당의 지도자로서 1924, 1929~35년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였다-역주) 및 그의 추종자들의 소심한 머리가 그러하듯이 -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패권을 쥐고 있던 대가이다.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역사 발전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의 독특한 결합으로 귀결된다. 후진적인 나라에서의 발전의 전체적인 모습은 불규칙하고 복합적이며 결합적인 특징을 띠는 것이다. 물론, 중간 단계들을 건너뛸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적 및 문화적 수용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더구나 후진국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입한 발전의 성과들을 자신의 낮은 문화적 수준과 맞추기 위해서, 종종 빌려 온 것들을 하향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러한 동화과정 자체도 일종의 모순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뾰뜨르 1세의 치하에서 특히 군사 및 공업에 관한 서구의 기술과 지식의 부분적인 도입이 농노제를-노동의 조직화의 기본 형태로서 -더욱 강화시키게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 것이다. 유럽식에 의거한 군대의 무장과 유럽으로부터의 차관은-양자 모두 보다 발전된 문화의 산물들임이 틀림없다-제정체제의 강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러한 제정 체제의 강화는 역으로 러시아의 발전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역사의 이성적인 법칙은 현학적인 도식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역사 전개 과정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인 발전 리듬의 불균등성은 후진국들의 운명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그리고 가장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외부적인 압력의 가혹한 채찍질 밑에서 후진적인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도록 끔 강요당하는 것이다. 발전 리듬의 불균등성이라는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으로부터 또 다른 법칙이 도출되는데, 적당한 명칭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결합 발전의 법칙(the law of combined development)이라고 부르겠다. 다양한 단계들의 응축, 상이한 국면들의 융합, 낡은 형태들과 보다 현대적인 형태들의 아말감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물론, 이 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물질적인 내용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해서, 뒤늦게 문명의 대열에 끌려들어온 모든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보다 부강한 유럽의 압력 아래서 러시아 국가는 국가 자원 가운데-서구와 비교해 볼 때-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소모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을 더욱 가중된 궁핍 상태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산계급의 토대까지도 약화시켰다. 그러나 또한 유산계급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국가는 법적 강제 조치 등을 통해서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특권화되고 관료화되어 버린 이 계급은 결코 완전한 성장을 이룩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 국가는 아시아의 전제 군주제와 보다 가까운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짜르들이 16세기 초부터 공식적으로 채택한 비잔틴적인 전제 군주제는 궁정 귀족들(dvoryane)의 도움을 통해서 봉건적 대귀족들(boyare)을 굴복시켰으며, 농민을 궁정 귀족들에게 농노로 안겨 줌으로써 이들의 충성심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비잔틴적 전제 군주제는 뻬제르부르끄(peterburg) 시대로, 즉 절대군주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전개과정의 후진성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즉, 16세기 말 무렵부터 시작된 농노제는 17세기에 비로소 정착되었으며, 농노제가 가장 번창한 것은 18세기였다. 그리고 186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전제 군주제의 형성 과정에서 귀족 다음으로 무시 못할 역할을 한 것은 사제 계급이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오직 국가에 대한 일종의 종복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러시아에서 교회는 서구의 가톨릭 교회가 도달했던 지배적인 위치로까지 상승한 적이 결코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절대 군주들에 대한 영적인 신하의 역할에 만족했으며, 또한 그러한 역할로부터 자신의 겸손에 대한 보상을 찾았던 것이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단지 세속적인 권력 체계내의 하급자로서만 어느 정도 권력을 향유했다. 짜르가 새로 바뀔 때마다 교회의 총대주교도 바뀌곤 했다. 수도가 뻬제르부르끄로 이전되었을 때,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은 훨씬 더 굴종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요컨대, 약 20만 명 정도의 세속 사제와 수사들이 일종의 종교 경찰의 자격으로서 관료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가로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정교회의 독점권과 재산 및 수입 등이 보다 일반적인 세속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후진적인 나라의 메시아 사상이었던 슬라브파의 교리는, 러시아 민중과 그들의 교회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반면 지배계급의 러시아는 뽀뜨르 1세에 의해서 이식된 독일식의 관료 체제라는 생각에 근거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와 유사한 주제를 놓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치 후진적인 노예들이 그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노예 수업을 받는 데에 보다 개화된 다른 노예들의 도움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 양, 튜튼족(원래 게르만 민족의 한 일파로서 이 문장에서는 독일인을 지칭함-역주)의 바보들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 :프러시아의 절대주의적 "계몽 군주"로서, 여기서는 러시아의 뽀뜨르 1세 역시 절대주의적 "계몽 군주"였음을 참조할 것-역주)의 전제 정치를 프랑스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이 짤막한 논평은 슬라브파의 낡은 철학의 정곡을 찌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최신의 학설들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비단 봉건 러시아뿐만 아니라 고대 러시아 역사 전체의 특징이기도 한 문화의 빈약함은 전형적인 중세 도시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러시아의 수공업은 농업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했으며 전반적으로 지방적인 가내 수공업(kustari)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 왔던 것이었다. 과거 러시아의 도시들은 상업과 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귀족 신분인 지주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비의 중심지였으나 생산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한자동맹(the Hanstatic.League:14세기 중엽부터 17세기까지 존속했던 독일 북부 도시들의 상업 동맹~역주)과 관계하고 있었으며 또한 따따르인의 통치를 결코 겪어 본 적이 없는 노브고로뜨(Novgorod:862년에서 1478년까지 존재한 러시아의 중세 국가로서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역주)조차도 상공업 도시라기보다는 단지 상업 도시였을 뿐이다. 물론, 러시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지방들에 분산되어 있던 소규모적인 농촌 가내 수공업들은 넓은 활동 범위를 지닌 중개상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 상인들은 결코 사회 생활에서 서구의 중소 부르조아지가 차지하고 있던 것과 비견될 만한 위치를 점유할 수 없었다. 서구의 중·소 부르조아지는 동업조합(길드;guild)내의 장인들, 상인들 및 실업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의 주변에 위치한 농촌과는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상업의 주된 통로는 모두 국경을 넘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외국의 상업 자본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서구의 도시들과 러시아의 촌락들 사이에서 중개상 역할을 하는 러시아 상인들의 모든 활동에 일종의 반(反)식민지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러시아의 자본주의 시대까지 계속 발전되어 왔으며,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가가 아시아적 형태의 모습을 띠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와 같은 러시아 도시의 빈약함에 있었다. 특히 도시의 빈약함은 종교 개혁의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 때문에, 봉건적이고 관료적인 러시아 정교회를 부르조아 사회의 요구에 적합한 모종의 보다 근대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 교회에 대한 투쟁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개별 종파의 형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구교 신봉파(starove.chestvo)의 운동이었다. (17세기 중반 교회의 전례(典禮)를 개정·통일시키려는 짜르의 개혁안에 반대하여 일어난 보수 종파의 운동으로서, 국가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꾀했으나 국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 역주)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약 15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우랄 지방의 코자크족들과 농민들 및 농노적 노동자들(농노로부터 충원되는 강제부역 노동자들로서, 이들은 당시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던 국가 소유의 작업장들의 중요한 노동력이었다-역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뿌가쵸프(Pugatchov)의 반란이다. 이 위협적인 민중의 반란이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 결핍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제3계급(The 3rd Estate.평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산업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 전쟁은 혁명으로 발전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촌의 종교적 분파들도 종교개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뿌가쵸프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귀족의 권익을 수호하는 관료적 절대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화시켰다. 귀족 계층이 어려움에 처한 이 때, 절대주의는 다시 한번 더 그들의 수호자로서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했던 것이다. 뾰뜨르 1세에 의해서 정식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유럽화는 19세기 내내 갈수록 지배계급, 즉 귀족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이러한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절대 왕권을 제한할 목적으로 군사적 모반을 계획했다. 이것은 귀족 가운데 진보적인 인자들이, 발전하고 있는 서구 부르조아지에 자극 받아,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3계급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한 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체제를 귀족의 특권적 통치 기반과 결합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농민 봉기를 촉발시키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모반은 단지 고립된 일군의 뛰어난 장교들의 계획으로만 남아 있었으며, 그들이 거의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상과 같은 것이 12월당원(Decabrist:데까브리스뜨)들의 반란이 갖는 의미인 것이다.

귀족 계급 중에서 최초로 농노적인 노동을 자유 임노동으로 대체시키자는 의견을 내세운 자들은 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또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수출량이 증가함에 따라 그 같은 의견은 더욱 지지 기반을 얻게 되었다. 1861년, 자유주의자 지주들을 지지 기반으로 한 귀족 관료 체제는 농노 해방령과 농업 개혁 조치들을 단행한다. 무기력한 러시아의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시행되는 동안 한결같이 비굴한 모습으로 들러리를 선다. 제정 체제가 러시아의 본질적인 문제인 농업 문제를 아주 탐욕스럽고 교활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것은 프러시아의 군주 체제가 향후 10년간에 걸쳐서 독일의 본질적인 문제, 즉 독일 민족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한 방법보다도 훨씬 더 비열한 것이었다. 어느 한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떠맡아 해결한다는 것은 바로 후진적인 나라에 고유한 결합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결합 발전의 법칙은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그 특성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늦게 출발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들이 거쳐온 발전의 전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대적인 기술들을 자신의 후진적인 상태에 알맞게 적용시킴으로써 발전의 궤도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전체적으로 수공업적 조합의 시대나 매뉴팩처의 시대를 건너뛰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업의 개별 분야들에서도, 서구에서 수십 년이 걸렸던 기술 발전의 몇몇 단계들을 부분적으로 건너뛰었다. 이 덕택에 러시아의 공업은 몇몇 기간 동안은 아주 급속히 발전했다. 1905년 혁명부터 제1차 세계대전사이에 러시아의 공업 생산은 거의 두 배나 증가했다. 이것은 몇몇 러시아 역사가들에게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발전의 정체성이라는 신화를 폐기해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토록 급속한 발전의 가능성은 바로 후진성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었으며, 이 후진성은-애석하게도-구체제를 일소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 구체제 러시아의 유산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 수준은 본질적으로는 그 나라의 노동생산성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노동생산성은 그 나라의 전체 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에 달려 있다. 제정 러시아가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던 1차 대전 직전에,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의 8분의 1 내지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었다. 러시아의 취업 인구 중에서 5분의 4가 농업에 종사한 반면, 미국에서는 농민 1명당 공업 노동자 2.5명 꼴의 비율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소득 격차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또한, 여기에다 추가로, 1차 대전 직전, 100 평방킬로미터당 철도의 길이는 러시아가 0.7km, 독일이 11.7km, 오스트리아-헝가리가 7km 였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비교 계수들 역시 이와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합 발전의 법칙이 가장 예리하게 드러나는 곳은 바로 경제 분야이다. 러시아의 농업은 혁명 전까지는 대부분 거의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반면, 러시아의 공업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기술과 자본주의적 구조 덕택에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들을 능가하기조차 했다. 1914년 당시, 미국의 경우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소기업들이 전체 공업 노동자의 35%를 고용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 비율은 17.8%밖에 안 되었다. 100명에서 1,0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중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 모두 대체적으로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0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의 경우, 미국은 전체 노동자의 17.8%를 차지한 반면, 러시아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41.4%였던 것이다. 더구나, 공업 중심 지역의 경우 그 수치는 더욱 높아진다.  뻬뜨로그라뜨 지역은 44.4%, 그리고 모스크바 지역은 57.3%나 되었다. 만일 러시아의 공업과 영국, 또는 독일의 공업을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위와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1908년 저자에 의해서 최초로 확인된 이러한 사실은 후진적인 러시아 경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통상 제시하고 있는 진부한 도식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 경제의 후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후진성을 단지 변증법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산업 자본과 금융적 자본의 융합은 역시 러시아에서도 이루어졌다. 그것도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어떠한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업이 은행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그것이 서유럽의 금융시장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공업(금속, 석탄, 석유 분야들)은 거의 전적으로 외국 금융자본 밑에 놓여 있었으며, 이러한 외국 자본들은 자신들을 위해 러시아내에 은행 지점망을 설치했다. 경공업도 중공업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 투자된 모든 자본들의 약 40% 정도를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비율은 기간산업 분야에서는 훨씬 더 올라갔다. 러시아의 은행과 기업이 발행한 주식의 지분에 의한 경영 통제권은 외국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의 자본이 확보한 지분이 독일 자본의 지분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고 우리는 아무런 과장 없이 단언할 수 있다.

러시아의 공업이 형성된 조건과 또 그 구조 자체가 이 나라의 부르조아지의 사회적 성격과 그들의 정치적 특징을 결정지었다. 공업의 과도한 집중화 현상은 그 자체로 이미 자본주의의 주도 계층과 민중사이에 어떠한 중간적인 계층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덧붙여서, 가장 중요한 공장들, 은행들, 운송회사들은 외국인의 소유였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들 외국 자본가들은 러시아로부터 이윤을 거둬 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국의 의회 내에서의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러시아에서의 의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고무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종종 그러한 투쟁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가 행한 비열한 역할을 상기해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사실들이 러시아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고립 및 반민중적 성격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요인들이었다. 러시아의 부르조아지는 그들의 맹아기에는 어떠한 개혁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왜소했다. 그리고 혁명을 주도해야 할 순간이 도래했을 때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발전의 전 과정에 걸쳐서, 노동계급이 배출되는 곳은 수공업적 조합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농업 분야였다. 즉,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영국에서처럼 과거의 무거운 전통을 힘겹게 끌고 가면서 수세기에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과 유대 및 사회관계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바로 가까운 과거의 관습들과의 급격한 단절을 통해서 비약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그리고 특히 제정 체제의 혹심한 억압 밑에서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혁명적 사고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후진적인 러시아의 공업이 자본가 조직의 최신 용어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나 이처럼 짧은 형성 과정을 되풀이하는 상황에 있었다. 금속 공업 분야에서는-특히 뻬쩨르부르끄의 경우-농촌과 완전히 단절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형성되어 가고 있던 반면, 우랄 지방에서는 여전히 반농 -반프롤레타리아적인 요소들이 우세했다. 농촌은 매년 모든 공업 지역들에다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이 배출되는 사회적 근원지 사이에 항상 밀접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무능력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과 맺고 있던 관계들로부터 직접 야기된 것이었다. 부르조아지는 노동자들에게 지신의 뒤를 따르도록 인도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부르조아지와 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그들의 목적에 보다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 부르조아지는 농민을 이끌어 갈 능력 역시 없었다. 왜냐하면 부르조아지는 대지주들과 공통된 이해관계로 묶여 있었으며, 따라서 기존의 토지 제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동요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촉발이 지연된 것은 단지 연대기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이 나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청교도혁명이 이루어졌을 당시 영국의 인구는 약 55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서 50만 명 가량이 런던에 살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의 전체 인구는 2,500만 명이었으며, 파리에는 고작 50만 명밖에 살지 않았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경우, 전체 인구는 약 1억 5천만 명이며, 그 중 300만 명 이상이 뻬뜨로그라뜨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단순한 수치상의 비교 이면에는 훨씬 중요한 사회적 차이점들이 숨어 있다.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에는 우리 시대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프롤레타리아가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의 경우, 도시와 농촌을 포함한 노동의 전 분야에 걸쳐서 노동계급의 수는 이미 1,000만 명을 돌파했던 것이다. 여기다 만일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수는 2,500만 명 이상이 될 것이며, 이것은 대혁명 당시 프랑스의 전체 인구의 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혁명의 주도 세력은 크롬웰(Cromwell) 군대의 억센 수공업자들과 자영 농민들로부터 출발하여 파리의 상뀔롯뜨(Sans-culottes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급진 소시민 및 대중-역주)들을 거쳐서 베쩨르부르끄의 공업 노동자들로 변화해 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혁명의 사회적 메카니즘, 그 방법들, 그리고 따라서 그 목적들까지도 급변해 나갔던 것이다.

1905년의 사건은 1917년의 두 혁명, 즉 2월혁명과 10월 혁명의 서곡이었다. 이 서곡 속에는 이미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모든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단지 그 당시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러일전쟁은 제정체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대중 운동을 위협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는 제정체제에 경종을 울렸다. 부르조아지와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대립하면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soviet:평의회)들을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농민들로 말하자면, 토지의 쟁취를 위해 농촌 전역에서 봉기들을 일으켰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군대내의 혁명적인 인자들까지도 소비에트를 지향해 갔으며, 이러한 소비에트는 혁명의 물결이 가장 고양된 순간에는 권력을 놓고 제정 체제와 공개적인 대결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공개적으로 나타난 모든 혁명적 세력들은 경험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제정을 동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자마자, 보란 듯이 혁명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민중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이러한 노골적인 결별은-그 이후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 단체들 중의 대다수를 부르조아지가 지도함에 따라서 그 단절의 폭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제정체제의 유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즉, 정부가 선별적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보다 충성스러운 사병들을 징집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학살적인 탄압을 가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정체제는 비록 몇 군데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무사히 1905년의 시련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충분히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곡과 앞으로 도래할 드라마 사이에 위치한 11년 동안의 역사 발전은 세력 관계에서 어떠한 변화를 유발시킨 것일까? 이 기간 동안, 짜르의 체제는 역사적 요구들과는 더욱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르조아지는 경제적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의 힘은 과도한 공업 집중화 및 외국 자본의 역할 증대에 의거한 것이었다. 1905년의 교훈에 영향을 받은 부르조아지는 보다 보수적으로 그리고 보다 용의주도하게 되어 간다. 이미 과거에도 하찮은 것이었던, 중소부르조아지의 상대적인 비중은 훨씬 더 축소되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일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종속은 급격히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에게 하나의 강령, 하나의 깃발,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계급은 오직 짧은 역사를 지닌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에게 제기된 막중한 과제들은 필연적으로 특수한 혁명 조직, 즉 단숨에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으며 또한 노동자의 지도하에 그들을 혁명적 행동으로도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조직의 지체 없는 건설을 촉진시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와서는 엄청난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소비에트는 단순히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으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결합 발전의 산물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가장 공업화한 나라인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조차 1918~19년의 혁명적 고양기에 소비에트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조직 형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자명한 일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의 당면 목표 관료적 군주제의 타도에 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과거의 고전적 부르조아 혁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혁명에서는 집중화된 공업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새로운 계급이 명백히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들은 새로운 조직 및 새로운 투쟁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결합 발전의 법칙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다 낡아빠진 중세적인 건물을 붕괴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혁명은 불과 몇 달만에 프롤레타리아 및 그들의 선두에 선 공산당에 의한 권력쟁취를 실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당면 과제들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들을 조직하고 거기에 병사들과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농민들을 가담시키고 있던 반면, 부르조아지는 여전히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인가 아니면 소집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흥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의 사태의 추이가 보여 주듯이, 우리들은 이 문제를 훨씬 구체적인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혁명 이념과 혁명의 형태에 관한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가 차지하는 위치를 규정해 보자.

17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일종의 종교 개혁을 구실로 한 부르조아혁명이 발생했다. 자신의 기도서에 따라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한 투쟁은 국왕과 귀족들, 교황과 주교들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 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그러한 투쟁이야말로 지상에서의 자신들의 이익을 신의 섭리의 확고한 보호 아래 놓는 일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계급의 투쟁 목적은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성경의 해석 및 교회의 전례(典禮)에 관한 문제들과 불가분적으로 얽혀 있었다. 대서양 너머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로써 봉인된 전통을 함께 가지고 갔다. 기독교의 해석에서 앵글로-색슨족이 보여 주는 실로 활기찬 다양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로부터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은 소위 "사회주의자" 각료들이 성서를 근거로 해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는 광경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겁자들은 17세기에 그들의 선조들이 그러한 자유를 위해서 실로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을 건너뛴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국가교회의 자격을 지닌 가톨릭교회는 대혁명 전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혁명은 부르조아 사회의 합목적적인 표현을 성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추상적인 원리 속에서 발견했다. 프랑스의 현 지도자들이 쟈꼬뱅주의를 아무리 증오할지라도 쟈꼬뱅들의 급진적인 표현을 빌려 자신들의 보수적인 통치 행위를 은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로베스피에르(Robes Pierre)와 같은 인물의 가차없는 행동 덕택인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낡은 사회를 전복시킨 것은 그들이 현재 빌려 쓰고 있는 구호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위대한 혁명들은 부르조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 및 그 사회의 제반 계급들의 의식에서의 새로운 변화를 표현해 주었다. 프랑스가 종교 개혁을 건너뛴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순전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즉, 부르조아 민주주의-역주)를 건너뛰었다. 낡은 시대 전체에 대해서 봉인을 찍어야만 했던 볼셰비키 당은, 혁명의 과제를 정식화하는 데 있어서 성서나,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 형태가 아니라 계급간에 존재하는 물질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는 이러한 물질적 관계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솔직하며 가장 명쾌한 표현을 부여해 주었다. 노동계급의 지배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가 장차 어떠한 역사적 시련들을 겪게 될지라도, 그것은-과거에 종교 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대중의 의식 속에 이미 확고부동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재발간에 붙이는 저자 서문

 

러시아 혁명의 성격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여러 다양한 이념노선들과 정치조직들의 형성에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 문제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실천적 성격을 부여받게 되자마자 사회민주주의 운동자체 내에서도 심각한 의견 대립을 자아냈다. 이와 같은 견해 차이는 1904년 이래로 멘셰비즘과 볼셰비즘이라는 두 가지 주요 노선들로 모습을 나타냈다. 멘세비끼의 관점은 우리 혁명이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러시아 혁명의 당연한 결과는 부르조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줘 부르조아 대의제도(代議制度: parliamentarism)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반면에, 볼셰비즘의 관점은 다가올 혁명이 부르조아적 성격을 불가피하게 가질 것임을 인식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을 혁명의 과업으로 제기하는 것이었다.

멘세비끼의 사회 분석은 극히 피상적인 나머지, 그 본질에 있어서 조야한 역사 유비론(歷史類比論: historical analogies)-이것은 "교양 있는" 속물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이 비상한 양극화적 모순들을 발생시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도, 뒤따라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도, 그 어느 것도 멘세비끼의 "참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추구를 막지 못했다. 그들에 따르면, "참된,"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을 선도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대의제적 및 가능한 한 민주제적인 조건들을 확립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멘세비끄들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징후들을 발견하려고 애썼으며,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발명해 냈다. 그들은 모든 "민주주의적" 선언과 시위의 중요성을 과장하면서도,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의 역량과 그들의 투쟁의 전도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해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정당한" 부르조아적 성격이 역사 법칙에 의해 요청되는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확보한답시고 그와 같은 진보적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하도 열렬히 추구한 나머지, 혁명의 와중에서조차 그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 스스로가 그것을 수행할 의무를-때로는 성공하기도 했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지만-떠맡고자 했다.

사회주의 이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즉 계급의 마르크스주의자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쁘띠부르조아적 민주주의가 러시아혁명의 제 조건하에서 행동했었다면, 틀림없이 멘세비끼가 2월 혁명의 "지도" 정당 역할을 수행하면서 행동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사실, 멘세비끼는 곧 영향력을 잃어 혁명 8개월째에는 계급투쟁에 의해 밀려나 버림받았으므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한 어떠한 중요한 사회적 기초도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볼세비즘은 결코 러시아의 혁명적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역량과 강고함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볼셰비즘은 다가 올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애초부터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혁명 프로그램 그 자체는 처음에는 수백만의 농민의 이익에 제한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가 농민 없이, 그리고 농민과 대항해서는 혁명을 철저히 완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는 (당분간이긴 했지만) 혁명의 부르조아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인정했던 것이다.

혁명의 내적 추진력과 그 전망에 대한 평가로 말하자면, 필자는 그 당시(1904년 9월  말부터 1917년 5월 초에 이르는 기간을 말함-역주) 러시아 노동운동의 두 주요 노선들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필자가 당시 가지고 있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러시아-역주)혁명은 그 최초의 과업에 관한 한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으로 시작됐지만, 이내 첨예한 계급 갈등을 야기시켜 피억압 대중의 선봉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최후 승리를 획득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부르조아민주주의적 프로그램에 제한되길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역주)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 혁명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으로 전화될 경우에만 혁명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혁명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은 혁명의 일국적(一國的) 한계와 더불어 지양되어, 러시아 노동계급의 일시적인 정치적 지배가 영속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유럽(혁명-역주)이 불발하게 되면 부르조아 반혁명이 러시아 근로 대중의 정부를 용납하지 않고 러시아를 뒤로-노동자와 농민의 민주공화국보다도 훨씬 뒤로-퇴보시켜 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한계 안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는 영구혁명(전략-역주)의 제 전술을 채택해야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는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제2인터내셔널의 개념 구분으로서 사유재산 제도 내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겨진 과제들-역주)과 최대강령(제2인터내셔널의 개념 구분으로서 사유재산 제도의 철폐가 전제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겨진 과제들-역주)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허물고 더욱더 철저한(radical) 사회 개혁을 수행해야 하며, 서구의 혁명에 대해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지원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1904년부터 1906년에 이르는 기간에 처음 씌어져 이제 재발행되는 이 책에서 개진되고 논증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15년간(1904년부터 1919년까지의 기간을 뜻함-역주)영구혁명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경합(競合: 대중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한다는 의미에서 -역주)하는 분파들(볼세비끼와 멘세비끼를 말함-역주)을 평가하는 데 잘못을 범했다. 양 분파 모두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했으므로 필자는 양 분파간의 차이가 분열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동시에 필자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방향이, 한편으로는 러시아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무의미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가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에 제한되는 것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함을 명백히 입증해 줄 것을 희망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점이야말로 양 분파간의 차이의 근저에 있는 이념적 기초를 제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망명 중에 양 분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필자로서는 볼세비끼와 멘세비끼간의 견해 불일치의 이면에 실로 한편으로는 비타협적 혁명가들이 결집되고, 다른 한편에는 갈수록 기회주의적이고 순응적인 분자들이 결집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볼세비끄 당은 가장 탁월한 선진적 노동자와 혁명적 인텔리겐차를 결속시킨 강고한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선진적 노동자와 혁명적 인텔리겐차는-어느 정도 내부 논쟁을 거친 후-노동계급의 사회주의 독재를 지향하는 전술들을 명시적으로 채택했다. 실로 그 전술들은 국제 정세 전반과 러시아의 계급관계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멘세비끼 파로 말하자면, 필자가 앞에서 말했듯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과제들을 수행할 의무를 떠맡을 만큼만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지금, 필자의 책을 공개적으로 재발행하면서 필자는 필자 자신과 그 밖의 다른 동지들이 여러 해 동안 볼세비끄 당 밖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초에 그 당의 운명과 자신들의 운명을 합치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이론적 원리들을 설명하길 원한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설명만으로는 이 책을 재발행하는 이유를 충분히 해명해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 그뿐만 아니라 필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기정 사실로 되기 훨씬 이전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사회·역사적 분석으로부터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이 러시아 혁명의 과제로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미 1904년에 그 사고의 골격이 형성되어 1906년에 씌어진 이 책을 지금 아무런 수정 없이 재발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멘세비끼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신해 대변한 이론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독재를 실제로 수행한 당(볼세비끼를 말함-역주)의 편에 있음을 입증해 주기에 족한 것이다.

어떤 이론의 궁극적인 시금석은 경험이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올바르게 적용해 왔다는 데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증거는,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사건들과 심지어는 우리가 그 사건들에 참여하고 있는 방식이 약 15년 전에 그 기본 진로가 예견되었다는 사실이 제공하고 있다.

필자는 글 하나를 재간행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평가와 전망』 제10장을 이루고 있다-역주) 그 글은 파리에서 발행된 『나세 슬로보』(Nashe slovo:"우리의 말"이란 뜻-역주)지(誌)의 1915년 10월 17일 호에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었다. 이 논설은 멘세비끼 지도자들이 "러시아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강령적 성격의 "편지"에 대한 비판이므로 논쟁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그 논설에서 1905년 혁명 이후 10년 동안의 계급관계의 발전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향한 멘세비끼의 희망이 더욱 설 땅을 잃었으며, 따라서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이 명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난 여러 해 내내 벌어져 온 이념 투쟁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이 "모험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은 실로 멍청이임에 틀림없다.

10월 혁명에 대한 멘세비끼의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카우츠키(Karl Kautsky)의 멘세비끄적 타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카우츠키의 이론적 및 정치적 타락이 이제 마르또프(Martov)와 단(Dan)과 체레쩽리(Tsereteli)의 "이론"들에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917년 10월 이후 카우츠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음을 듣는다. 즉, 노동계급에 의한 정권 장악이 사회민주주의자 당의 역사적 과업으로 여겨져야 하긴 하지만, 러시아공산당(RCP:볼세비끼-역주)이 카우츠키가 정한 특정한 진로와 특정한 시간표에 따라 권력을 잡지 않았으므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께렌스끼(Kerensky), 체레쩰리 및 체르노프(Chernov)에게 이양시켜야 올바르다는 것이다. 카우츠키의 반동적이고도 현학적인 비판은 제1차 러시아 혁명에 충분히 사정을 알고 동참했고 그의 1905~6년 논설을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더 예기치 못하게 다가왔음이 틀림없다. 당시에 카우츠키는 (실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의 유익한 영향을 받아)러시아 자체의 계급투쟁 수준과 국제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상황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부르조아 민주공화국으로 귀결될 수 없고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 인정하고 있었다. 그때 카우츠키는 사회민주주의자 다수파가 포함된 노동자 정부에 대해 진솔하게 쓰고 있었다. 그는 계급투쟁의 진정한 전로를 가변적이고도 피상적으로 짜맞춰진 정치적 민주주의에 종속시키려는 일을 생각조차 안했다.

그 당시 카우츠키는 (러시아-역주)혁명이 처음에는 수백만의 농민과 도시의 쁘띠부르조아지를 분기(奮起)시켜-단숨에 그런 게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점차적으로-마침내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 부르조아지 사이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광범위한 농민 대중은 그 정치 의식의 발전이 여전히 원시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기들(즉, 농민)의 후진성과 편견을 반영할 뿐인 중도적 정당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당시 카우츠키는 만약 프를레타리아가 권력 장악으로 향하는 혁명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권력 장악을 무기한 연기시켜 버린다면 이와 같은 포기 행위가 단지 반혁명을 위한 터를 닦아 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일단 혁명 권력을 쥐게 되면 어느 순간에도 혁명의 운명을 의식 수준이 저급하고 정치적으로 미각성된 대중의 비영속적이고 심정적인 태도에 의존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며, 그와는 사뭇 반대로 자기들 손에 집중된 정권을 바로 이들 후진적이고 미각성된 농민 대중을 각성시키고 조직화시킬 강력한 (국가-역주)기구로 전환시킬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또한, 러시아 혁명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부름으로써 혁명의 과업을 제한시키려는 것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소치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더불어, 그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유럽 프롤레타리아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들은 지배계급으로서의 자기들의 위치를 이용해-지금의 카우츠키가 주장하고 있듯이 자기들의 지위를 부르조아지에게 신속히 양보하는 게 아니라-유럽과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강력한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에 충실한 이와 같은 세계적 전망을 카우츠키나 우리가 1917년 11월과 12월의 이른바 제헌의회(the Constituent assembly) 의원선거에서 농민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에 달린 문제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15년 전에 그 윤곽이 잡힌 전망이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 카우츠키는 딴소리를 하면서 러시아혁명에 출생증명서를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가 대고 있는 이유는 러시아혁명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관청에 때맞춰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믿을 수 없는 타락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타락은 1914년 8월 4일 전쟁 공채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사건에서보다 그들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자가 러시아혁명에 대해 이따위 속물적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훨씬 더 가증스럽게 표현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카우츠키는 수십 년 동안 사회혁명의 이념을 발전시켜 왔고 지지해왔다. 이제 사회혁명이 현실이 되고 나자, 그는 두려워서 사회혁명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평의회(소비에트)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독일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의 강력한 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카우츠키는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답답한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봄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정년 퇴직하여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맛보게 되자, 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이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도대체 그가 화를 낼 줄 안다면 말이다) 봄은 결국 봄이 아니라 단지 자연계의 대혼란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헛되이 논증하려 하는 교장 선생님과 꼭 닮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가장 권위 있는 공론가조차 신뢰하지 않고 봄의 소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제자들로서, 독일 노동자들과 더불어 혁명이라는 봄이 사회라는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부합하여, 또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법칙과 완전히 부합하여 도래했다는 확신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초역사적 지칭물을 가리키는 교장 선생님의 지휘봉(指揮棒)이 아니라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 과정의 방식과 수단에 대한 사회적 분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06년의 논설(제1장부터 제9장까지를 포함하는 『평가와 전망』초판 부분을 가리킴 -역주)과 1915년치 논설(제10장에 해당하는 첨가된 부분으로서, 1915년 10월 17일자 『나체 슬로보』지에 실렸던 글을 가리킴-역주)로 이루어진 본문에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은 채 놔두었다. 필자의 원래 의도는 각주를 달아 현 상황에 맞춰 제시하려는 것이었으나 본문을 훑어본 후 그 생각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세부 항목까지 짚고 넘어가려면 책의 두께가 두 배로 불어날 판인데, 필자로서는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그렇게 "이중구조"화된 책이 독자가 읽기에 별로 편리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더욱 중요한 점으로서 필자는 이 책의 큰 줄기로서 관통하고 있는 일련의 개념들이 우리 시대의 조건들과 매우 유사하므로 이 책을 숙독해 그 내용을 숙지하려고 애쓴 독자는 쉽사리 이 책이 해설한 바에다가 현재의 혁명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얻은 필요한 사실적 자료를 보충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2일 끄레믈린에서

레온 뜨로츠끼

       

<평가와 전망>

 

러시아 혁명(이 문장에서는 1905년 제1차 혁명을 가리킴-역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오래 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불가피함을 예견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화석화된 절대주의 체제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서 혁명이 일어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다가올 혁명의 성격을 예견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혁명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혁명의 즉각적․객관적 과업들이 "부르조아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한 정상적인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있음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옳았음은 입증되었다. 이 점은 논의할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자들 앞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과업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전개 과정 중에 있는 혁명의 내적 구조(메커니즘)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여러 가능성들을 포착하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우리의 혁명을 단순히 1789-93년의 사건(프랑스대혁명을 말함-역주)이나 1848년의 사건(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을 공표한 직후에, 유럽 대륙을 휩쓸었으나 영구혁명이 되기 직전에 차단당한 노동계급 혁명을 말함-역주)과 동일시한다면 어리석은 과오이리라. 자유주의의 배양처인 역사 유비론(歷史類比論)이 사회 분석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은 전적으로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 전반의 역사적 발전의 특수한 추세 때문인데, 이번에는 혁명의 그러한 특수성이 전적으로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우리 앞에 펼쳐 주는 것이다.


제1장 러시아 역사 발전의 특수성

 

우리가 러시아의 사회 발전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사회 발전을 비교해 보면-유럽 여러 나라들의 역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으면서 러시아의 역사와는 변별적(辨別的)으로 구별되는 측면이란 점에서 그 나라들을 일괄해서 취급할 수 있겠다-러시아 사회의 발전에서 주된 특징은 상대적인 원시성과 완만성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이 자리에서 이와 같은 원시성의 자연적 원인들을 고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 생활이 좀더 빈곤하고 좀더 원시적인 경제적 기초 위에 성립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역사적 과정을 결정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경제적 법인체들과 계급 및 (전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질서인)신분(estate)은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 수준에 달했을 때에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의 분화는 분업의 발전과 보다 전문화된 사회적 기능들의 창출에 의해 결정되므로,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에 동원된 인민들이 자기들 자신이 소비해야 하는 것(필요 생산물-역주) 말고도 그 위에 여분의 생산물, 즉 잉여(생산물-역주)를 생산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즉, 잉여를 소외시킴으로써만 비생산 계급이 등장해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직접 생산자 계급 자체 내의 분업은 농업이 일정 정도 발전하여 농업 생산물을 비농업 인구에게 공급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회 발전에 관한 이러한 기본적인 명제들은 이미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의해 명확히 정식화된 바 있다.

이런 사실의 당연한 귀결로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할 수 있겠다. 즉, 우리나라 역사에서 노브고로뜨(the Novgorod) 시기는 유럽의 중세초기와 일치하지만, 자연적·역사적 조건들(불리한 지리적 입지 조건, 낮은 인구밀도 등)로 인한 완만한 페이스의 경제 발전이 계급 형성 과정을 억제하여 그 과정에 좀더 원시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만약 러시아가 고립되어 그 자체의 내적 경향들의 영향력만 받았더라면 러시아의 사회 발전이 어떤 모습을 취했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러시아의 사회 생활은 일정한 대내적 견제 토대 위에 성립되었지만, 줄곧 대외적인 사회·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직접 그러한 압박 아래 놓여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회·국가 조직체(organization)가 그것의 형성 과정에서 이웃의 다른 (사회·국가)조직체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자신의 경제 관계의 원시성과 이웃의 비교적 고도(高度)로 발전된 경제관계가 후속 과정에서 이 조직체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러시아 국가(state)는 원시적인 경제 토대 위에서 성장하여 더 고차원적이고 더 안정된 토대 위에 세워진 국가 조직체들과 관계를 맺고 갈등도 겪게 되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앞에 놓여 있다. 즉, 모스크바 공국(the moscow State)과의 투쟁에서 몰락한 킵차크 국(the Golden Horde:몽고족이 13세기 중반에서 15세기말까지 러시아를 지배할 당시 건설했던 국가-역주)처럼 러시아 국가도 몰락하든가 혹은 경제 관계의 발전에서 이운 국가들을 추월하여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활력을 흡수하든가의 두 가지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는 몰락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에 이미 충분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러시아-역주)국가는 엄청난 경제력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러시아가 외적에 의해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실만으로는 러시아의 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 점은-아마도 영국은 예외일 수도 있지만-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에도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이들 유럽 여러 나라들은 상호 생존경쟁에서 거의 동일한 경제적 기초에 의존하였으므로, 그 나라들의 국가 조직체의 발전은 이렇게도 강력한 외압에 좌우되지 않았다.

크리미아(Crimea)와 노가이(Nogai)의 따따르족(Tatars)에 대항한 투쟁은 극도의 노력을 경주하게 만들었지만, 말할 나위 없이 영불간의 백년전쟁 중에 기울인 노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구(舊)러시아로 하여금 소형 화기(火器)를 도입하고 스뜨렐치(Streltsi) 상비군 연대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따따르족이 아니었다. 즉, 기병 기사단과 보병 부대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따따르족 때문이 아니라 리투아니아(Lithuania)와 폴란드 및 스웨덴의 압박 때문이었던 것이다.

서구측의 이런 압박의 결과로 (러시아-역주)국가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모해 버렸다. 즉, 러시아 국가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특권 계급들에게 손해를 입힘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 특권 계급들의 기존의 완만한 발전마저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국가는 농민의 필요 생산물조차 강탈해 갔다. 국가는 농민의 생계를 위한 생산물을 박탈했던 것이다. 결국, 농민은 자기 땅에 제대로 정착할 시간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자기가 가꿔 놓은 경작지를 도망치듯이 떠나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인구의 증가와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잉여 생산물 중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부분을 국가가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국가는 그나마도 속도가 완만한 신분(estate) 분화 과정을 더욱 완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필요 생산물 중의 중요한 부분을 가로채 버림으로써 국가는 바로 자신의 토대가 되고 있던 원시적인 생산 기반조차도 파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존속하고 기능하기 위해서, 그리고 특히 사회적 생산물 중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큼을 양도받기 위해서 국가는 여러 신분들을 위계(位階)적으로 계층화시켜 조직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국가는 자신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잠식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억지로 정부의 법적 강제 조치들을 통해서 그러한 토대를 발전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제의 발전 과정을 국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 놓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러시아 문화사 학자인 밀류꼬프(Milyukov)는 러시아의 바로 이러한 점이 서유럽의 역사와 정반대되는 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떠한 반대되는 사실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후에 관료제적 절대주의로 발전한 중세의 봉건 군주제는 일종의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출현해서 존재하게 된 이상, 이러한 국가 형태도 그 자체로 고유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며, 그러한 이해관계는 하층 계급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상층 계급들의 이해관계와도 상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 대중과 국가 조직체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중간 벽'을 구성하고 있던 지배적인 신분들은 국가 기구에 압력을 행사해 국가의 실제적인 활동의 내용을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국가 권력은 하나의 독자적인 힘으로서, 상충 신분들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고유한 관점으로부터 바라보게 되었다. 국가 권력은 상층 신분들의 욕망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했으며 그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국가와 제 신분계층간의 관계의 실제 역사는 이같이 결국은 역학적 상관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궤도를 따라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동일한 과정이 일어났다.

국가는 발전하고 있던 여러 경제 집단들을 이용하려 노력했으며, 그것들을 국가 자신의 고유한 특정 재정적․군사적 목적들에 종속시키려고 애썼다. 당시 출현하고 있던 지배적인 경제 집단들은 국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신분적 특권 형태로 만들어 더욱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의 여러 사회 세력들의 이러한 활동의 전개 과정은 서유럽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국가 권력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노동 대중의 희생 위에 기초한 국가 권력과 사회 상층 집단들간의 상호봉사 관계는 권리와 의무, 세금과 노역의 부담과 특권의 분배 방식으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이 관계는 신분제에 기초한 중세 서유럽의 군주제와 비교해 볼 때, 러시아의 경우 귀족 및 사제들에게는 덜 유리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밀류꼬프처럼 서구에서는 제 신분이 국가를 만들었지만 러시아에서는 국가 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에 따라 신분들을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과장된 표현이며 또한 전혀 균형 감각이 결여된 말이 될 것이다.

신분들은 국가의 행위, 즉 법에 의해서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회 집단이 국가 권력의 도움을 빌어서 특권 신분으로 부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신분은 이미 자신의 사회적 이점들을 십분 활용해서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에 정해져 있는 어떤 위계 서열표나 또는 포상 규범에 따라서 신분계층들이 제조될 수는 없는 법이다. 국가 권력은 보다 높은 단계의 경제 구성체로 나아가는 근원적인 경제발전 과정을 자기가 지닌 모든 자원을 통해서 촉진시켜 줄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 국가는 국민의 생산력 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독차지했으며, 따라서 사회 구조의 고착화 과정을 방해해 왔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러한 과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연히 러시아 국가는 구조적으로 보다 분화된 서구의 영향과 압력 하에-이러한 압력은 군국주의적 국가 조직체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뒤늦게나마 원시적인 정제 토대를 바탕으로 사회 분화를 강제로 촉진시키려고 노력했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구성상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바로 이 같은 강제성의 필요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국가는 국민의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더불어, 자신이 지닌 막강한 권력을 자신의 고유한 재량에 따라 상층 계급의 발전 방향을 감독하는 데 사용하려고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감독 활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전에, 국가는 먼저 바로 자신의 조직이 지니는 취약성과 원시적인 성격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국가 조직체의 원시적인 성격은,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바로 사회 구조의 원시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러시아의 경제적 조건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러시아 국가는 보다 발전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성장해 온 인접 국가 조직체들의 우호적이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압력에 밀려서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어떤 일정한 시점부터-특히 17세기 말부터-러시아 국가는 자신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나라의 자연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새로운 분야의 수공업, 기계류, 공장, 대기업, 자본 등이 자연경제의 줄기에 인공적으로 접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국가의 산물(産物)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의 모든 학문은 정부의 노력에 의한 인위적인 산물, 즉 국민의 무지(無知)라는 자연적인 줄기에 인공적으로 접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공장처럼 학교가 국가의 인위적인 산물이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국가와 학교 사이의 초창기 관계들을 나타내 주고 있는 특징들을 회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교육을 위한 국가의 노력은 이러한 ‘인위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학업을 게을리 하는 학생들은 사슬에 묶여 처벌을 받았다. 학교 전체가 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학업은 일종의 부역의 한 형태였다. 학생들은 급료를 지급받았던 것이다. 기타 등등의 사실들.-L.T. 

(L.T.)는 뜨로츠끼 자신의 註이다. 특별한 표시가 없는 것은 영역자의 註이다.)

러시아의 사상은 러시아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보다 발전된 경제와 보다 차원 높은 사상의 직접적인 압력 하에 발전했다. 경제 조건들의 자연 경제적 성격 때문에, 즉 대외 교역의 빈약한 발전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러한 나라들로부터의 영향은 그들과 러시아 국가간의 직접적인 경제적 경쟁 관계로 표출되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국가 자체의 존립을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표현되었다. 서구 경제학은 러시아의 경제학에 국가를 매개로 해서 영향을 미쳤다. 보다 잘 무장된 적대적인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 남을 수 있기 위해서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공장들을 세우고, 항해 학교들을 설립하며, 축성술에 대한 교과서들을 출판하는 등의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만일 이처럼 광활한 나라의 국내 경제의 전반적인 흐름이 국가가 추구하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제반 경제 조건들의 발전으로 인해서 순수과학 및 응용과학을 위한 수요가 창출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모든 노력들은 결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자연스럽게 실물 경제로부터 화폐 및 상품 경제로 발전해 가고 있던 국민경제는 단지 그 같은 발전에 부합되는 정부 조치들에 대해서만 반응했으며, 또한 그 조치들이 자신의 발전과 부합하는 범위에만 국한해서 작동했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것은 러시아의 공업 및 통화 제도, 그리고 국가 대부(國家貸付)의 역사이다.

멘젤레에프(Mendeleyev)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공업 분야들은(금속, 제당, 석유, 정유 및 섬유 공업까지도) 정부 조치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조성되었으며, 때로는 대규모의 국가 보조금의 도움을 받기조차 했다. 그리고 특히 정부는 언제나 의식적으로 보호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통치 기간 내내 정부는 이 같은 정책을 솔직하게 구호로 내세웠다.‥‥‥보호주의의 원칙들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러시아에 적용시킨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우리나라의 지식인 계급 전체보다도 더 진보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D.맨젤레예프,『러시아에 대 한 이해를 위해서』, 뻬쩨르부르끄,1906, p.84)

공업 보호 정책을 이처럼 찬양한 박식한 멘젤레예프 교수는 정부의 그러한 정책이 공업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재정상의 이유와 부분적으로는 군사 기술상의 이유로 강요된 것임을 덧붙여 말하는 것을 잊어 버렸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보호 정책은 공업 발전의 근본적인 이익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업가 집단들의 개별적인 이익들과도 종종 대립되곤 했던 것이다. 실제로, 방적 공장의 소유주들은 "면화에 대한 높은 관세는 면화 재배를 장려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재정상의 이익을 위해서 부과되고 있다"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곤 했다. 정부가 신분계층을 "창출"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열심이었던 것처럼, 공업의 "이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된 관심사는 국고의 재정을 충당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토양에 공장화된 생산 체계를 이식하는데 전제주의 체제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발전하고 있던 부르조아 집단들이 서구의 정치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전제주의 체제는 이미 유럽 국가들과 완전히 동일한 물질적 수단으로 무장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전제주의는 중앙집권화된 관료 기구에 의거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료 기구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확립하는 데는 전혀 무용지물이었지만 체계적인 탄압을 수행하는 데는 커다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토의 광활함은, 제반 행정 활동에 지령을 내려 주고 탄압 활동을 비교적 단순하고 신속하게 수행하도록 해주는 전신 설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철도는 나라의 한 끝에서 다른 한 끝으로 군대를 급파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혁명 이전의 유럽의 전제주의 정부들은 철도나 전신과 같은 설비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가 소유한 군대는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이 군대는 러일전쟁과 같은 심각한 고비에는 무용지물임이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통치를 위해서는 충분히 쓸모 있는 것이었다.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 정부뿐만 아니라 1848년 혁명 당시의 프랑스 정부조차도 오늘날 러시아의 군대와 유사한 군대는 결코 갖지 못했다.

조세 및 군사 기구를 통해서 나라를 최대한도로 쥐어짜면서 러시아 정부는 연간 20억 루블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군대와 예산을 보증으로 해서 전제주의 정부는 유럽의 금융시장(원문에는 증권거래소로 되어 있음-역주)을 국고 조달원으로 활용하였으며, 러시아의 납세자들은 이러한 유럽의 금융시장에 공물을 바치는 구제불능의 공납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에 와서 러시아 정부는 무적의 위세를 지닌 거대한 군사·관료 조직으로서, 그리고 재정 및 채권거래 조직으로서 세계와 상면하게 되었다.

절대 군주제의 재정적·군사적 위세 앞에 유럽의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압도당했으며, 또한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절대주의에 공공연히 도전해서 한판을 겨루어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모든 신념을 상실해버렸다. 절대주의의 군사적·재정적 위력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한 어떠한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우가 사실로 입증되었다.

정부가 더욱 중앙집권화되고 더욱 사회와 유리된 독자적인 것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사회 위에 군림하는 전제주의적인 조직으로 되어버리는 일이 보다 빨리 일어난다. 그 같은 조직의 재정 및 군사력이 보다 커질수록 그 조직은 보다 오랫동안, 그리고 보다 성공적으로 존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 비록 러시아 국가가 사회 발전의 가장 초보적인 요구들조차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국내 행정상의 요구들뿐만 아니라 군사적 방위를 위한 요구들조차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할지라도(그런데 원래 이처럼 강력한 국가는 군사적 안보의 유지를 위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연간 20억 루블의 예산을 쓰며 80억 루블의 부채를 안고 있고, 수백만 명의 무장된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이처럼 거대한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같은 상태가 오랫동안 답습되어 감에 따라 경제 및 문화 발전의 요구들과 정부의 정책 사이의 모순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정부는 자신이 지닌 타성을 '수십억 배'로 보다 강력하게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급조된 위대한 개혁들'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그런데 그 개혁들은 이러한 모순들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모순들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다-정부가 자발적으로 의회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깃은 훨씬 더 어려워졌으며, 또한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이 사회에 지시해 준 이러한 모순들로부터의 유일한 출구는, 절대주의라는 보일러 내에서 절대주의 자체를 폭발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증기를 축적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사회 발전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를 계속 존속시켜 줄 수 있었던 국가의 행정적․ 군사적․재정적 위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처럼 혁명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혁명을 유일한 출구로 만들어 준 것이다. 더구나, 이 혁명은 절대주의의 위세가 자기 자신과 국민 사이에 파놓은 심연의 깊이에 비례해서 더욱더 철저한(radical) 성격을 띠어 갈 것임이 이미 분명해졌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는 오직 자신만이 이러한 발전의 방향을 설명했으며, 또한 그러한 발전의 일반적인 형태들을 예고해 주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맨젤레예프 교수와 같은 반동적인 관료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업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하고 있다:"이점에 관해서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인가를 감지했으며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이해했지만,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어법(!)에 따라서 폭력에 의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하층 천민들의 난폭한 본능에 영합해서 혁명과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p.120))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가장 황당무계한 ‘실천지상주의'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혁명적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끼)은 환상으로, 그리고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사회 발전 전체가 혁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혁명의 동력은 무엇인가?


제2장 도시들과 자본

 

도시화된 러시아는 최근 역사의 산물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지난 수십 년간의 산물이다. 18세기 초 뽀뜨르 1세(대제)의 통치 말기에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의 수는 32만 8천 명을 약간 상회했다. 즉, 나라전체 인구의 약 3%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와서 그 수는 130만 1천명으로서 총인구의 약 4.1% 가량 되었다. 1812년까지 도시 인구는 165만 3천 명으로 증가했으며, 그것은 전체 인구의 4.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었을 때 그 수는 아직 348만 2천 명 정도로서 인구의 7.8%밖에 되지 못했다. 끝으로, 마지막 인구 조사(1897년)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1,628만 9천 명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전체 인구의 약 13%에 해당하는 수치이다.(이 수치들은 밀류꼬프(Milyukov)의 『논문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시베리아와 핀란드를 포함할 경우, 러시아 전체의 도시 인구는 1897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1,712만 2천 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13.25%를 차지한다.(멘젤레예프의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제90쪽에 실려 있는 도표를 참조할 것.))

만일 우리가 도시를 단순히 행정 단위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경제 구성체로서 본다면, 우리는 위에서 본 수치들이 도시의 발전에 대한 참된 실상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러시아 국가의 역사를 통해서 전혀 합리성이 결여된 이유들을 근거로 도시로 승인되거나 도시 승인이 취소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들은 "대개혁"(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농노해방령의 공포이다-역자 주) 이전의 러시아에서 도시는 하찮은 비중을 차지했으나 최근 10년 동안 엄청나게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미하일로프스끼(Mikhailovsky)의 계산에 따르면, 1885년과 1887년 사이의 도시 인구의 증가율은 33.8%에 달한다. 이것은 러시아 전체의 인구 증가율(15.25%)의 2배를 넘는 것으로서, 농촌 인구의 증가율(12.7%)과 비교해 볼 때 거의 3배에 가까운 것이다. 만일 여기에다 공단 마을 및 부락들을 추가한다면, 도시인구의(농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급격한 증가는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근대적 도시들은 거주자의 수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형에서도 이전의 도시들과는 차이가 난다. 즉, 근대적 도시들은 상업 및 공업 활동의 중심지인 것이다. 반면, 과거 러시아의 전근대적인 도시들은 대부분 어떠한 경제적인 역할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군사 및 행정상의 요충지나 요새들이었으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국가에 고용된 자들로서 국고의 지출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시는 행정 및 군사, 징세(徵稅)의 요충지였다.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하여, 국가에 봉직하지 않는 주민들이 도시의 변두리나 외곽지대에 정착하였을 경우에도 그들은 전혀 아무런 구속 없이 자기들이 전부터 해오던 농업을 생업으로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과거 러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모스크바조차도, 밀류꼬프에 따른다면, 한낱 “왕실의 장원이었으며, 주민들의 상당한 부분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즉 시종이나 근위병 또는 하인으로서 궁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1701년의 호구조사에 따른다면, 대략 16,000세대 가운데 단지 7,000세대만이, 즉 44%만이 독립적인 정착자들 및 장인들이었으며, 이들조차도 국가의 언저리에서 살면서 궁정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나머지 9,000세대들은 교회(1,500세대)와 지배 신분층에 속해 있었다.” 이처럼, 러시아의 도시들은 아시아의 전제 군주제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중세 유럽의 수공업 및 상업 도시들과는 대조적으로, 오직 소비자의 역할만을 수행했다. 중세 서구의 도시들은 장인이 촌락에서 살아야 할 어떠한 정당한 이유도 없다는 원칙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공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도시들은 결코 그러한 목적을 추구하려 애써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매뉴팩처와 수공업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들은 농업과 연결된 채로 시골에 있었다.

국가의 가혹한 수탈과 더불어 낮은 경제 수준 때문에 어떠한 부의 축적이나 사회적 분업도 가능할 수가 없었다. 서구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여름이 훨씬 짧았기에 겨울의 휴한기가 훨씬 길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매뉴팩처는 결코 농업과 분리되지 못했으며, 또한 도시에 집중될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여전히 농촌에 머물러 있었으며, 단지 농업에 수반되는 보조적인 생업 활동으로 여겨졌다. 19세기 중반 무렵, 자본주의적 공업이 널리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과 대립했던 것은 결코 도시의 수공업이 아니라 주로 농촌 촌락의 수공업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밀류꼬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당시 러시아에는 기껏해야 150만 명 정도의 공장 노동자들이 있었다. 반면, 아직도 400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가내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와 병행해서 이전부터 자신들의 주된 생업이었던 농사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의 공장들은 바로 이와 같은 계급(농촌의 수공업자-역주)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공장들을 세우는 데 이 계급은 (농민적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역주)결코 미미한 역할조차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후의 인구 증가 및 생산성의 증대로 사회적 분업의 기초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은 당연히 도시의 수공업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선진국들의 경제적 압력의 결과로서, 이러한 기반을 자본주의적 방식의 대규모 공업이 먼저 선점해 버렸다. 결국, 도시의 수공업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동업조합(길드:guild)에 장인이나 직인으로 가입하면서 도시 인구의 핵심을 이루었던 분자들이 러시아에서는 400만 명이나 되는 농촌의 가내 수공업 종사자들 속에 정체적으로 머물러 있었으며, 따라서 점점 동업조합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되어 갔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파리의 가장 혁명적인 지구들의 주민들 중 핵심을 이루고 있던 부분도 바로 수공업자 계급이었다. 결국, 러시아에서 도시의 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했다는 사실 자체만 해도 우리의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간의 무비판적인 비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파르부스(parvus)는 대단히 예리하게도, 러시아 혁명의 특수성은 바로 위의 사실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 L.T.)

근대적인 도시의 본질적인 경제적 특성은 도시가 농촌으로부터 공급되는 원료를 가공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운송 수단의 발달은 도시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단지 철도를 부설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대한 공급원들을 거대하게 확장시킬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인민 대중을 도시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인구를 집중시킬 필요성은 큰 공장들을 주축으로 하는 공업의 성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근대적인 도시, 다시 말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을 지니는 도시의 주민의 핵심은 첨예하게 분화되어 있는 임금 노동자 계급이다. 비록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로 이 계급이 우리의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업 체계는 프롤레타리아를 전면에 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지반(地盤)을 붕괴시켰다. 1905년 혁명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은 도시의 쁘띠부르조아들, 즉 수공업자들과 소상인들 등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거의 걸맞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 자본의 상당한 부분이 외국에서 이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수적 성장 및 힘과 영향력의 증가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의 성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수공업 체계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러시아를 정복한 배후에는 유럽 전체의 발달된 경제가 있었으며, 그 전면에는 직접적인 경쟁 상대로서 농촌 촌락의 무력한 수공업자나 도시의 불쌍한 수공업자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노동력으로 활용할 보유자원으로서 반(半)거지상태의 농민이 있었다. 농촌을 자본주의의 족쇄로 속박하는 데 절대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거들어 주었다.

먼저 절대주의는 러시아의 농민을 세계 금융시장의 공물헌납자로 전환시켰다. 국내 자본의 결여와 더불어 정부는 끊임없이 화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고리(高利)의 외국 차관을 거침없이 도입했다. 예까쩨리나 2세(Catharine ll )의 통치기부터 위떼(Witte)와 두르노보(Durnovo)내각에 이르기까지 암스테르담, 런던, 베를린, 그리고 파리의 은행가들은 러시아의 전제주의를 거대한 금융시장의 투기 대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노력해 왔다. 소위 국내 대부라고 하는 것도, 즉 국내 금융기관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출도 상당 부분에서 결코 외국 차관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내 금융기관들도 사실 외국 자본가들과 합작으로 설립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중한 세금 부과를 통해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화시키고 빈민화시키면서, 절대주의는 유럽 금융시장으로부터 들여온 막대한 금액을 가지고 병력을 증강하고 전함과 철도, 그리고 감옥들을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러한 비용 중의 많은 부분은 전혀 비생산적인 것들이었다. 국민 생산 가운데 막대한 부분이 이자의 형태로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유럽의 금융 귀족들은 보다 부강하게 되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의회주의 국가들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증대시켜 가면서 상업 및 산업 자본가들을 뒷전으로 물러서게 만들어 온 유럽의 금융 부르조아지는 짜르 정부를 사실상 자신들의 신하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금융 부르조아지는 짜르에 반대하던 러시아의 부르조아 세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으며, 또한 그럴 의향도 없었다. 그들이 러시아의 부르조아지에게 공감이나 반감을 표시하는 데에 지침이 되는 것은, 1798년 짜르 빠벨(Pavel)에 대한 차관 조건으로서 네덜란드의 은행가 호페(Hoppe)와 그 일당들이 정해 놓은 원칙, 즉 "이자는 정치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 금융시장으로서는 절대주의를 유지시키는 것이 심지어 직접적인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형태의 정부가 들어설 경우, 그처럼 엄청난 고리의 이자를 지불해 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가 차관만이 유럽의 자본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국가 예산 중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던, 외국 차관에 대한 이자로서 지불된 돈은 상업 및 산업 자본의 형태로 다시금 러시아에 재투자되었다. 그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풍부한 천연자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때까지 결코 저항하는 데 익숙해 있지 않던, 조직화되지 못한 노동력 또한 구미가 당기는 대상이었다. 1893년부터 1899년까지의 급속한 공업 발전시기 중 그 후반부는 유럽 자본의 이입이 급속히 강화된 시기였다. 이렇듯,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을 동원시킨 것은 대부분이 유럽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자본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본이었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을 경제적으로 예속화시키는 과정에서 유럽 자본은, 자신이 오늘날의 상태로 발전하기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거쳐야만 했던 일련의 기술적·경제적 중간 단계들 전체를 생략한 채로 가장 선진적인 형태의 주요 생산 분야들과 교통 및 통신 수단들을 러시아에 이식시켰다. 그러나, 유럽 자본이 자신의 경제적 지배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장애물이 갈수록 줄어듦에 따라서 그것이 수행하는 정치적 역할은 더욱더 사소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럽의 부르조아지는 중세의 제3계급(the Third Estate, 즉 '평민')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들은 귀족과 사제 신분에 의해서 자행되던 약탈과 폭력에 대항해서 민중의 이익이란 명분으로 항거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물론 그러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바로 그들 자신이 민중을 착취하려는 속셈이었다. 신분(estate) 제도에 기초한 중세의 군주제는, 관료제적 절대주의 체제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서, 즉 사제와 귀족 계급의 요구와 주장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주로 도시의 주민들에 의존했다. 그리고 부르조아지는 자기들 자신의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 바로 이 같은 과정을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관료제적 절대주의와 자본가 계급은 동시에 발전하였으며, 1789년 양자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 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은 것은 바로 부르조아지임이 판명되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서구 국가들의 직접적인 압력 하에 발전하였다. 그것은 제반 경제적 조건들을 통해서 자본가적인 부르조아지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서구 국가들의 통치 및 행정 방법들을 모방해 왔다. 러시아의 도시들이 아직까지 극히 미약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당시에, 절대주의는 이미 막강한 상비군과 중앙집권화된 관료 기구 및 조세 기구를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유럽 은행가들에게 상환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다. 절대주의의 직접적인 협력과 더불어 자본은 서구로부터 밀려들어 왔으며, 단기간 내에 많은 고풍스런 재래의 도시들을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심지어는, 전에 아무도 살지 않던 곳에 단시간 내에 상업 도시와 공업 도시들을 건설시켰다. 이러한 자본은 종종 대규모의 주식회사 형태로 나타났다. 1893년부터 1902년에 걸친 10년간의 급속한 공업 발전 기간 동안 주식 형태의 자본의 총액은 20억 루블로 증가됐다. 반면에, 1854년에서 1892년 동안의 주식자본 총액은 단지 900만 루블로 증가되었을 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곧 자신이, 응집된 엄청난 대중으로 변모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반면, 이 같은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전제주의 체제 사이에는 대단히 적은 수의 자본가 부르조아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인민'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외국인과 같은 존재들로서 역사적 전통도 없었고, 오직 이윤만을 갈망하는 존재들이었다.